카테고리 없음

틸티 - 바닐라.

인사1 2019. 9. 20. 21:12

*

 

 

서로가 만난 지 얼마 안 되던 날이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틸리아가 새파란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두꺼운 과잠을 두른 몸에다가, 제 파트너의 팔뚝 하나를 품에 쏙 넣어안고 있었다. 그 옆을 걷던 종종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멈춘 곳은 편의점 앞이었다. 휴대폰에 비친 시각은 새벽 1시 반. 분명 늦었지만 이런 대학로 근처에선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늦은 시간에 편의점을 들른다는건 그 편의점. 이라는 시설의 이름을 확고히 해주면서도 민폐인 것이다. 어떤 존재든 정도가 있지. 새벽 서네시가 넘어가면 앵간히 박쥐마냥 낮밤이 바뀐 체질이 아닌 이상 계산대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졸아터진 알바생을 보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당연히 저기요. 하고 깨워야 할 수 밖에 없는데. 당연히 어넌한테는 그런 건 별로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니었다. 틸리아라면 어찌 깨워도 안 일어나면 마지막으로 계산대를 엎어버려서라도 계산을 하겠다는 마음이겠지만. 

 

딸랑. 다행이도 그런 일은 당연 벌어지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이 시각에 자면 눈총받기 십상인 동네이니 말이다. 바닐라 콘 두 개. 푸른 눈이 반달을 그리듯 휘었다. 껍질은 안 핥아드세요? 내가 체면이 있지. 제 껄 다 먹기도 전에 어넌이 버리려는 걸 탐내면서 달려들었다. 나 주세요 나! 결국엔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지만. 시무룩해하는 틸리아의 입에 어넌이 제 껄 한 입 물려주는 걸로 시끄러운 떼는 멈췄다. 포장지를 벗겨서 남은 과자가루들도 탈탈 털어먹는 모습이 약간 짠돌이같이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게 그렇게 아까우면 평소에 이상한 맛집 같은데 찾아가지 말고 제대로 된 데를 가거나 하지 그래. 그거랑 이거랑 같나요? 포장지를 다 벗겨먹곤 제 손이랑 옷 위에 떨어진 가루를 아스팔트 위에 탈탈 털고 나서야 틸리아는 다시 어넌의 팔에 팔짱을 꼭 꼈다. 짧은 대화가 이어지곤 목적지는 언제나 가던 곳이 가던 곳이었다.

 

종종 있던 일이 종종이 아니게 될 때도 있는 법이다. 약속을 잡지 않은 밤이었다. 편한 차림으로 걷던 어넌의 새로 익숙한 점퍼차림의 학과 무리가 지나갔다. 틸리아가 늘 입다시피한 두꺼운 과잠이 떼로 지나가는데 눈길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 사이에 틸리아가 있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들고 말이다. 입 안에 넣곤 몇번이나 씹어 녹여먹으면서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고 있었다. 그닥 크지도 않고 작은 아이스크림이었다. 인파는 순식간에 그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

 

늦여름이었다. 단풍도 슬슬 물들어갈 때 잡은 약속에선 어쩐지 둘 모두 술 빨이 안 들어가는 것 같았다. 땀이 흐르고 힘도 많이 쓰던 계절이 지나가서 그런가. 평소에 먹던 도수가 영 맞지 않았다. 늘 가던 바에서 일찍 나온 탓에 시간은 아직 11시였다.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틸리아야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에는 어넌도 좀 두꺼운 긴팔 점퍼를 입고 있었다. 호텔에 가서 따 마실. 아까 바에서 마신 것보다는 도수가 약한 과일맛 소주를 몇 병 골랐다. 진하고, 가루가 많이 날리고 냄새나는 안주를 고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오징어랑 치킨 쪽에서 실랑이가 좀 났지만 결국 고른 것은 가격이 좀 센 오뎅국과 3분 달걀찜이었다. 안주는 틸리아가 계산하기로 했다. 알바생이 병들을 하나하나 들어 찍는 와중에 어넌의 눈에 냉장고가 들어왔다. 틸리아가 굼벵이 같은 알바를 기다리며 제 카드를 손가락으로 돌리고 있을 때, 슬쩍 집어온 건 바닐라와 초코 아이스크림 콘이었다. 이것도 같이 계산이요. 나머지들은 그 새에 검은 봉지 속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아이스크림은 자동으로 틸리아의 손에 들렸다. 

 

나갈 때였다.

 

"가격 똑같으니깐 바꿔가도 되죠?"

 

원래 들려 있던 초코콘을 냉장고 안에 던지듯 집어넣곤, 틸리아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집어들었다. 알바는 별 상관 안한다는 듯 짧게 긍정해주곤 다시 제 할일을 했다. 능청스럽게 포장지를 벗기며 틸리아가 걸어나왔다. 죄송해요! 전혀 죄송해보이지 않는 얼굴로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야. 어넌이 무슨 말을 꺼냈을 땐 이미 틸리아가 입 안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웅큼 가득 물었을 때였다. 대화는 잠시 뒤에 그걸 거의 덩어리째로 삼키고 나서 이어졌다. 찡한 듯 미간을 꾹 찌푸러트리며 하늘색 볼이 퍽 달아올른 틸리아가 입을 열었다. 왜요? 너 왜 바꿔왔어? 대답은 짧았다. 그냥 바닐라가 좋아서요. 너 저번에 과 애들이랑 있을 땐 초코맛 먹었잖아. 굳이 자기가 기억해 준 호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투였다. 

그게 어때서요? 차가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곧 풀어졌다. 정말 의문이라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벽안에 어넌이 끝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아니. 그니깐 너 초코맛 좋아하잖아. 그게 왜요? 

 

어차피 내가 이러는 게 더 좋잖아요.

 

기가 찬 듯 어넌의 아랫입술이 입꼬리와 함께 축 처졌다. 뭐? 못 들었어요? 내가 이러는 게 더 좋잖아요. 파트너 씨.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다음 입을 베어먹은 틸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술병이 비닐 속에서 달캉거리는 소리만 났다. -그래서.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는 건 아니지? 어넌이 물었다. 아뇨. 어딘가 중간중간에 비린 향 나는게 역하고 중간중간에 씨인지 초콜릿인지 모르는게 씹히는 것도 구리고 일단 꽃씨 향기가 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요. 누가 꽃이 좋다고 꽃을 씹어먹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틸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더 베어물었다. 축 처진 입술을 질겅 씹던 어넌이 입을 열었다.

 

"...야. 싫은 건 알겠어. 아까 바꿔온 이유도 알겠고."

 

"근데 굳이 내가 좋아하는 걸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어?"

 

 

 

 

 

...틸리아가 눈을 깜박이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계속 먹을꺼니깐 내 말이 그 때마다 신경쓰이면 좋겠거든요. "

그게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