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티 - 첫 잡담
- 존나 지멋대로 캐해석 주의
- 수위 있음 주의 제가 빻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언니~ 저 왔어요!"
두터운 나무 문이 열리며 가게 안에 바깥의 소음이 옅게 들어왔다. 옅고, 날카로운 파란색 눈빛이 빼꼼 가게 안을 바라보다가 휙 하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푸른색 리본을 한들거리며 들어온 앳된 학생은 회색 빛 트렌치 코트를 걸치곤 자리에 앉았다. 물론 대중적이다. 현대에 트렌치 코트 한 벌 안 입어본 사람이 있겠는가. 안 사더라도 선물정도 한번 받기 십상이다. 다만 지금이 한여름이라는 것 빼고 말이다. 그래. 지금은 8월이다. 언니, 라는 호칭을 익숙하게 받아넘긴 바텐더는 거기에 놀라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냉장고에서 아마 그 몫으로 준비된 스크류 드라이버 한 잔을 내밀며 바텐더가 키득 웃었다.
"오늘도 여전하네, 틸리아. 또 허탕이었어?"
"...다 알면서 그래요? 진짜 그런 쑥맥이 없었다니깐요! "
웃는 바텐더에게 틸리아라고 불린 그가 달려들듯 쏘아붙였다. 그와 동시에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의 앞섶을 거칠게 풀어헤치자, 안에 입은 옷들은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대충 주워입고 나온 것이 티나는 검은색 캐미숄자락 너머로는 이제 막 사라지기 시작한 붉은 자국들은 하얀 살 위 군데군데 발려져 있었다. 시작부터 이러니 감질나서 그냥 뛰쳐나왔어요. 멍도 안 드는 약골이면서 새디스트래. 찡얼찡얼거리면서 독한 보드카가 든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아마 그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바 안에는 손님이 하나 더 있었다. 틸리아는 그게 자기 전공의 2학번 위의 선배라는 것도, 지금 스스로 틸리아가 내뱉은 자기 취향과 정반대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리고 문제는, 그는 예의차리는 것을 신경쓰는 존재였다.
"...저기요."
그가 일부러 소리를 딱 내며 칵테일 잔을 내려놨다. 그 때까지도 틸리아는 자기가 방금 체크아웃도 안 하고 숙박비를 넘긴 상대가 얼마나 형편없고 쓰레기 같았는지, 자기가 거의 오늘로 꼭 1년 반째인데도 제대로 된 존재놈을 못 찾았다는 말들을 바텐더에게 꿍얼거리며 안주로 시킨 치즈스틱을 질깃하게 씹고 있었다. 아마 그의 말도 치즈스틱과 함께 씹어버린 듯한 그는 술기운에 더 버럭버럭거리면서 가슴을 팍팍 치고 있었다. 이젠 맞은 자국인지 술때문에 달아오른건지 자기가 스스로 쳐서 손자국이 난 건지도 모르겠으니 제 3자 입장에선 하는 말을 잘 듣더라도 흔한 감정노동 진상이었다.
"저기요."
한번 더 따악. 하고 나무 테이블 위에 잔을 소리나게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화난 목소리에 아차, 하는 표정으로 틸리아가 그 쪽을 돌아보았다. 녹색 베이스의 사나운 백안이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시간대에는 늘 그와 바텐더 밖에 없었던 모양인 듯, 그는 상황 자체도 곤란스럽지만, 여기에 다른 이가 있는 것도 의외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 왜요? ...시끄럽게 했으면 미안해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그가 그 쪽으로 돌아보며 키득거렸다. 제 손의 서너배는 될 듯한 스트레이트 잔을 내려놓는 소리. 틸리아는 그걸 옆으로 쳐서 미끄러트리듯 보냈다. 유리를 깔아 매끄러운 바 테이블은 살짝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상대 가까이에 잔을 멈춰놓았다. 이젠 평소에 바텐더에게 늘어놓던 푸념보다 이 시간까지 이런 곳에 있는 그에게 관심이 동했는지, 좀 멀리 앉아 있던 틸리아는 의자서 내려와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명백히 상대가 싫어하는 표정을 봤음에도, 그는 아랑곳않고 옆에 붙어앉아 보내놓은 잔을 들었다.
"웬일로 이 밤에 여기까지 왔어요? 여기 거의 나만 아는 단골인데!"
"...그 쪽만 안다고 그 쪽만 여기 오라는 법 있습니까."
반은 불만, 반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틸리아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틸리아는 쭉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야- 라는 어두와 함께 저가 이 바에 매일 오는 시간과 분위기, 자기가 이때까지 이 근처에서 가 본 클럽들, 거기서 자기가 얼마나 멋지게 춤을 추고 몇 명을 이때까지 꼬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대는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면서 간간히 그렇네요. 네. 그렇습니까. 하고 맞장구만 쳐 줄 뿐이었다. 가끔씩 틸리아가 제 머리에 묶은 푸른 리본을 만지작거리면서 자기만 이야기 하는 것에 지루해하기도 했지만, 곧 그는 또 다른 이야기거리를 생각해내서 이어내기에 바빴다.
몇 시간이었을까. 잔의 얼음이 반쯤 녹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어쩌다가 이 근처 이야기를 하게 되니 제 밤자리 이야기까지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을까. 그 놈은 나를 너무 깔보더라. 그 놈은 누구를 같이 불러 세 명이서 하자고 하더라. 그리고 바로 몇 시간 전, 그 놈은 완전 입만 살았더라. 그런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잘 못했네요. 그 존재가."
그쵸? 얼마나 쑥맥이었는지! 하고 대답하려던 틸리아의 혀가 굳었다. 잘 못했다고? 못한 걸 내 이야기만 듣고 어떻게 알지?
정적.
바텐더는 둘만을 남겨놓고 주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설거지 하며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 잠시 정적으로 머물러 있었다. 먼저 치고 나온 건 상대였다.
"...이때까지 잘만 이야기하다가 내가 이러니깐 할 말을 못 찾아요?"
"누가, 누가 지금 초면에 이야기 하고있던 사람이."
사디스트인지 알아요.
틸리아는 뒷 말을 씹으면서 제 혀 끝을 일부러 씹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이야기 하는 것 보단 낫죠."
"난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 쪽 판이 좁으니깐 모르는 존재한테 이렇게 뒷담깔 수도 있는거지."
"...지금 당신 아까 이야기한 것들, 평범한 존재면 이미 기겁해서 도망갔을 소재만 말한 거 알아요?"
한숨을 쉬며 저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에 잠시 멈칫했다. 틸리아는 입술을 두어번 씹고는 상대를 잠시 노려보는 것도 질렸는지, 퉁명스레 중얼거리며 반쯤 물이 녹아 밍밍해진 칵테일을 들어마셨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물론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꽤 메이저한 취향이었다. 틸리아 자체의 취향 역시 흔히 마조히스트라는 단어라면 딱 떠오를만한 이미지였기에. 하지만 그걸 일반인이 어쩌다가 지금 바에서 만난 사람이 그런 취향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그렇게 가볍게 들어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뒷목에서 찬 기운이 뻐근하게 치고 들어왔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지금까지 한거지. 소위 말하는 현타가 틸리아의 관자놀이까지 치고 올라와 꾹꾹 눌렀다. 차라리 그냥 까놓고 이야기하는 게 마음이 편할 듯 싶었다.
"그래서, 그 쪽은 잘해서 잘 못한다고 말할 수 있나보죠?"
거의 얼음이 다 녹은 잔을 돌리던 상대가 살짝 비웃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곤 대답했다.
"그 쪽은 상대한테 그렇게 잘 맞춰줘서 그렇게 제대로 못 해봤나 봐요?"
틸리아는 이게- 하고 곱지 못한 말이 나오려던 걸 입술을 꽉 씹어삼켰다. 아까부터 계속 씹어댄 탓에 이빨에 옅은 분홍빛이 남았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낮과는 다르게 감정이 격해지는 것이 틸리아의 안에서 느껴졌다. 그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저가 선수를 쳐버리고 싶었다. 무언가 굉장히 충격적인 말을 뱉어서 그를 당황시키고 싶었다. 예의차리면서 얌전한 척 있다가, 약점잡히니 저한테 계속 직구로 까대는 그를-
"...그렇게 말할꺼면 한번 하지 그래요?"
틸리아가 웃으면서, 그의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단정한 가죽 단화 끝을 회청색 운동화가 툭 건드렸다. 바 테이블에 턱을 괸 그가 제 푸른 리본을 검지에 휘감았다. 상대가 잠시 놀라 뒤로 의자를 살짝 끌자, 눈꼬리를 아래로 끌어내려 웃으며 틸리아는 그의 품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가 한번 더 물었다. 할래요? 가까이서 있자하니, 그가 마시던 칵테일의 씁쓸한 커피향과 알콜 냄새가 진득했다.
먼저 일어선 것은 상대였다.
"...늦었으니 자리 옮길꺼면 빨리 그러죠."
시간은 벌써 세시 반. 새벽녘이라고 불러도 될 시간이었다. 제 코트 앞섶을 정리한 틸리아도 그를 따라 일어서곤 바텐더를 불렀다. 제안한 건 나니깐 술 값은 내가 내줄께요. 하면서 그가 바텐더에게 그의 몫까지 계산을 내밀었다. 여름밤은 한기가 심하질 않았다. 밖은 사람이 많질 않았고, 살짝 어색하게 아스팔트를 밟는 불협화음이 두 사람 사이에 울렸다. 살짝 죄지은 듯한 느낌이 틸리아의 가슴을 왜인지 모르게 눌렀다. 그 때 상대가 입을 열었다.
"...통성명이나 할래요? 어차피 곧 잊어버릴테지만."
조용했고,
"틸리아, 워드요. 성씨가 쉽죠?"
단순했다.
"...티어넌 콕스입니다."
시작은 그렇게 건조한 여름밤이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