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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롯 - 뒤척거리기

인사1 2020. 1. 23. 00:39

 

빛을 얻은지 얼마 되지 않은 수호자의 쉘터는 추억으로 가득 찰 만한 요소가 티끌만큼도 없다. 쉘터는 그저 텅 비어있던 방이며, 그것을 어떻게 채울지는 수호자가 살아가며 정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정상적이고 건강하게 기억을 만들어가며 자라는 수호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쉘터 안에 추억이 쌓이는 법이다. 지금 내가 말하려는 이 수호자는 빛을 얻은지 겨우 5일 되었으면서 자신의 숙소를 별로 좋지 못한 추억으로 더럽혀버렸다. 옆에는 이젠 입이 아파져서 할 말도 없어진 고스트가 왱알왱알 날아다니고있는 이 수호자의 방 안에 찬 물건은 다음과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들, 참새, 텅 빈 서랍장 등등 다른 수호자들이 집들이를 해주면서 가져다준 자잘하고 쓸데없는 싸구려 가구들, 그 안에 보관된 로어 기록과 지식들.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니어보이는, 일이주 정도는 빨지도 않고 쓴 채로 내버려둔 침구 세트 하나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내가 끝에 서술한 2개가 이 건강하지 못한 수호자의 방을 채우고 있는 건강하지 못한 물품들이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충 그가 탑에 처음 온 날, 그는 웬 불청객을 만났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탑에 온 지 일이주 남짓이 겨우 지난 이 새로운 빛은 용맹하고 정의로웠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모두 가릴 만큼 인성이 그닥 좋지 못했고 성생활또한 그랬다. 그의 고스트가 매일 이마를 박으며 내가 미쳤지- 를 시전하더라도 이미 때는 늦었다는 거였다. 다행히도 부활한 지 얼마 안 된 이 수호자는 거짓말하는데에 능숙하질 못했고, 그가 문란한 성생활을 요구했던 수호자들은 대부분이 이 수호자의 망나니성을 고스트들보다도 먼저 알아채고 거부했다. 물론 몇몇은 넘어갔겠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하고 서술로 벅찬 부분이 있으니 말이다. 제르단에게는 이 정신나간 헌터 - 롯이라고 한다. - 가 보기에 3가지 장점이 있었다. 

 

첫째. 내가 누군지 모르고 순수하다.

둘째. 이제 막 잔해더미에서 기어나온 엑소는 정비소에 가서 정비를 받아야할텐데, 그러면 애 파츠가 뻑뻑해질 것이다. 새 엑소 수호자의 오랫동안 낡은 파츠는 많이 닳아 반들거리고 촉감이 좋고 헐거워서 움직임이 좋다.

셋째. 엉덩이가 빵실하다. -타이탄!-

 

이 다음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여러분들이 예상하실거라고 생각하지만 짧게 서술하겠다. 롯은 이제 막 십몇분전에 빛을 얻은 수호자가 밴시나 자신의 대장인 자발라와 인사하기도 전에 따먹으려고 발정이 났고, 온갖 스윗한 척을 하면서 제르단에게 수호자들에게 금기라는 전생을 들먹이면서 우리가 연인이었을수도 있대 엑소는 더군다나 리부팅을 하면 기억을 잃는다잖아 이 외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가지 금기들을 서술하면서 하룻밤 자게 해달라고 꼬셨다.

 

제르단은 거기에 넘어갔다.

 

이것이 왜 지금 전혀 당신들이 모르는 아주 개인적인 지식이 벌써부터 타이탄의 보관함 깊숙히에 처박혀있고, 바닥에 낡은 침구세트가 굴러다니는 이유다. 다음 날, 롯은 그게 뻥이라고 바로 자백했고, 이 부활한지 하루밖에 안 된 순진한 수호자는 자신에게 하루만에 일어난 일을 도저히 믿질 못한 채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롯이 자기 쉘터에서 나가게 두었다. 그 다음에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려고 로어를 기록했고, 그 다음에는 그 로어를 보고 또 믿지를 못해 자기 쉘터 보관함에 처박아두고, 보다 못한 고스트가 리부팅을 권유했지만 그래도 소중했던 기억이라며 도저히 자기 머리 뒷부분에 있는 프로그래밍 하나를 구동시키지 못한 채로 일주일이 흐르고,

 

지금 아까 첫 문단에서 서술한 시점이 되었다.


 

"제르-, 이제 괜찮으니 리부트 해도 된다니깐요? 지금 탑에 와서 다시 밖으로 나가보질 않았잖아요."

 

제르단의 옆에서 날아다니며 힘겹게 말하고 있는 이 고스트는, 아직 너무 충격이 심해 자기 이름도 지어주지 못하는 수호자를 어떻게든 다시 보좌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르단은 멍하니 벙 찐채 일주일동안 제 새 침구만 끌어안고 있는게 이제 일상이 되버렸지만 말이다. 고스트는 한 삼일째부터 그랬듯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해보다가 여기가 수호자 당신의 집이에요- 라느니, 다들 정말 친절할꺼에요- 라느니 같은 말들을 하면서 제르단에게 힘을 북돋워줬던 과거의 자신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아니 진짜로 자기가 부숴지면 제르단은 다시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다시 죽게 되니 그건 재차 제쳐놓고. 

 

제르단은 몸을 한번 뒤척이면서 일주일 전의 밤을 생각했다. 자기한테 속삭이던 삐걱거리는 기계음 섞이던 목소리. 한 손에 안기던 얇다란 허리와 제가 먼저 입고 있던, 싸구려 소재지만 꽁꽁 싸매 튼튼하게 만들려고 노력한 방어구와는 다르게 얇다란 피 하나만 있고 외피가 뜯겨나가 뇌관이 보이던 방어구. 눈 앞에서 자기 손을 들어보이고 쥐락펴락하자 공기만이 손가락 사이에 잡혔지만, 그의 눈에는 그 헌터가 있었다. 여기까지 읽고 대충 이 수호자가 찌질한 한남같은 놈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이 수호자가 지금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고, 탑에 와서 제일 먼저 하게 된 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플러팅을 받고 섹스를 하고 사실 뻥이었다는 거대한 진실을 마주친채로 충격을 받아 일주일간 누워만 있어 사실 세상을 접한지는 하루도 아니고 섹스 시간까지 포함해서 많아봤자 대여섯시간이란 점을 다시 상기시켜드리겠다.

 

"제르..제.. 아, 수호자! 그러면 그 수호자를 보러가는게 어때요? 그러니깐, 지금 이렇게 누워만 있는 것보다 바로 만나보는것이 더 낫지 않겠어요, 수호자?"

 

겨우 한번 들은 이름을 같은 생명체인 고스트가 제대로 기억할 리 없었다. 그래도 첫글자가 '제' 라는 것을 기억해 낸 것에 용하다고 칭찬을 해줘야할까? 제르단은 그 말에 일어서서 자신의 고스트를 일주일만에 제 눈에 초점을 맞춰 보았다. 잠시 자기 주변의 롯이 썼던 침구와 자신의 로어가 담긴 보관함을 보다가 그는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수호자아! 곁을 빙글빙글 돌며 고스트가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간만에 그가 빛이 되어 그의 몸 속에 녹아들었다. 물론, 수호자의 사명이라던가 다른 수호자들과의 인지도같은 것들로 일으켜세우기에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최후의 방법을 써서 그를 일으켜세웠다. 

 

"고스트."

"네? 제르?"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할까?'

 

살짝 쉰 목소리로 제르단이 중얼거리자, 고스트는 아주 정석적인 답안을 내놓았다.

"그야 안부인사라던가 반갑다 같은 말을 해야죠? 뭐- 화력팀 지원을 원한다던가 게다가 지금 밀린 임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일단 지구 쪽 순찰부터 가는 것이-"

 

다음 말에 고스트는 말을 끊었다.

 

"어떻게 하면 그 분이 나랑 같이 자 주실까...?"

 

 

"네?"

 

고스트는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인간이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시절일 때부터 사용하는 일종의 리부팅이었다. 명칭은 [추억보정]. 끔찍했던 기억을 어떻게든 좋은 기억으로 무마해보고자 다른 기억을 되살려서 그 기억의 감정에 덧씌우거나, 아니면 그 대상과 다른 좋은 시간을 보내 옛날의 나쁜 일들을 털어내고자 하기 위한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지금 롯에 대한 추억을 지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 늘리고 부풀리기 위한 행동만이 아직 어리고 성숙하지 못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를 한 몇 달 정도 뒤에야 알게 되는 고스트가 이걸 지금 시점에서 이해할 리는 없었기에, 이 고스트는 네에에에에에??? 하고 소리지르며 안돼요! 절대로 다시는 만나지 마세요! 하고 부질없는 몸부림을 제르단 앞에서 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든가 말던가, 제르단은 롯을 보기 위해서 일어섰다. 그의 고스트가 난리부르스를 치든 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