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키드갈 - Loop.

"세계가 어제 멸망했어."
이제 막 기상알람에 깨어나고 있는 까만토끼에게 흰 인어가 말했다. 인어는 별 같잖은 말을 장황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별이 박힌 까만토끼가 척추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어의 배를 흘깃 보았다. 하얀 도시가 무너져내려 불그스름하고 거무튀튀한 색을 띄고 있었다. 인어가 무중력을 타고 우주선 천장으로 꼬리를 올려 눈 앞에서 그것을 치웠다. 인어는 토끼가 스스로 기상알람을 끌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좀 보면 꺼주지 그래. 반쯤 찌푸린 눈으로 천장의 인어를 올려다보던 토끼가 우주선의 알람을 꾹 껐다. 그제서야 인어는 천장서 토끼가 있는 곳으로 나풀나풀 떨어져 주변을 돌았다.
"아까 무슨 생각이 들었어?"'
"무슨 아까. 잠에서 깼을때? 아니면 잠들기 전에 말이야."
"내 배를 봤잖아."
늘 보는 풍경이지.
지금 재가 내 우주선에 탄 뒤로 저 짓을 얼마나 했더라? 토끼는 기억 속의 붉은 것들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제 망토가 그것들보다 더 붉었기에 그 기억은 제 모습과 뒤섞여서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도 잠에서 덜 깼으니 더 그러했다. 좁은 세안공간에서 대충 오늘을 맞이할 준비를 마칠 즈음, 뒤에서 인어가 토끼가 쓰는 빗을 던져주었다. 나이스 캐치. 어차피 그렇게 빠른 속도로 오는 것도 아니어서 잡아채기 쉬웠지만 인어는 그렇게 말해주곤 다시 천장의 공간을 차지하러 떠올랐다.
빗을 빗으면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보였다. 다시 그가 말했던 게 떠올랐다. 내 배를 봤잖아. 그러게, 처음에 그걸 보고 나서.. 무슨 심정이었더라? 예전에 한번 들렀던 카지노의 이벤트로 그와 몸이 뒤바뀌었을 때, 자신이 그의 배에 대마초를 쑥쑥 심어서 그들의 영양분과 고혈을 자신의 금화로 쪽쪽 빨아먹은 기억은 났다. 드가르는 그 뒤로 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멸망을 했는지, 아니면 다시 일으켜세워졌는지. 적어도 그 때 손을 배 근처에 가져가대기만해도 핵이 날아오던 상황인 것은 다시 기억이 났다.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덕분에 이 광활한 우주에서 버틸 자원이 이렇게 또 늘었으니.
인어가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은 2가지 경우였다. 하나는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을 때. 하나는 자신의 화를 주체할 수 없을 때. 적어도 지금 토끼가 확언할 수 있는 건, 오늘의 인어는 전자의 이유로 세계를 계속해서 멸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또 무슨 변덕으로. 문득 아까 그가 말한 게 생각이 났다. 세계가 멸망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 그건 그가 그에게 물을 생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건 그의 세계였고, 멸망했을 때 감흥이 오는 건 처키의 세계였다. 아침이라는 시간에 시답잖은 생각이 떠다니며, 몸 속은 금속음이 잘그락잘그락거리며 돌아다녔다.
"처키, 내기할래?"
돈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냥 그 글자에 원래도 서 있는 처키의 귀가 더 쫑긋 섰다.
"뭘 걸고?"
"네가 이들이 멸망하는 것에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는데 걸께."
"그러면 나는 슬픔을 느낀다는데 걸면 되냐?"
그런 셈이지. 인어가 공중을 부유하며 이제 막 우주선의 새로운 좌표설정을 시작하려는 토끼에게 말했다. 불공평한 내기인데. 나는 이미 슬픔을 느끼지 않았거든. 드가르가 다시 반문했다. 아니, 시간제한이 없는 내기야. 네가 슬픔을 느끼는 순간, 내 승리를 네가 가져가는거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다시 처키가 반문했다. 아니. 근자감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드가르가 내며 다시 반문했다.
"야, 임마. 네가 그렇게 근자감을 네세우기 전에 중요한 게 빠졌어."
"뭐길래?"
말꼬리를 올리는 드가르에게 처키가 말했다.
"판돈을 뭘로 할껀데?"
드가르는 거기에 무르지 않고 처키에게 속삭였다.
"다음 멸망은,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게 해줄께."